불완전하고 자유로운 인간
(작년 포킹룸리서치에 참여하며 끄적였던 글을 옮겨옴)
어쩌다 호기심에 프롬프트기반 인공지능에 관련해서 리서치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됐고, 나를 제외한 참여자들의 논리적이고 현학적인 언어들에 주늑이 들어버렸다. 사변적 상상력은 무엇이며 현상학은 무엇이며 인공지능의 편향성과 블랙박스는 무엇인가...
기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 이미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기술의 편리함,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는 것 같은 불안함, 새로운 기술과 사유에 대한 호기심, 이 모든게 짬뽕되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리서치는 어떻게 하는거지.
일단은 책을 읽었다. 요 몇년간 읽은 책들의 합보다 요 한달간 읽은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이렇게 못 썼었나? 쓰고나면 지우고 싶다.
아 지우고 다시 쓰기 위해 쓰는거구나.
쓰기위해 쓴다.
인공지능 챗봇은 '쓰기'보다 '읽기'의 경험을 강화한다는 말에 무지 공감했다.
처음엔 내가 어울리지 않는 모임에 괜히 참여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공부를 많이 했다. 사실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고 해도 여전히 아날로그는 존재할테다. 인공지능이 창작의 영역까지 그럴듯하게 해내고 있지만 창작이라는 행위는 결과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내적인 변화의 미학, 아름다움의 실감이 있다. '쓰기'의 감각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점점 빨라지고 편리해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건 무엇인지. 동시에 가능해진 것은 무엇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나는 '쓰기'와 함께 '듣기'의 경험도 점점 상실되고 있다고 느낀다. 모두가 자기 말만 한다. 알고리즘은 내 말에 호흥하는 컨텐츠를 보여줘서 내가 아닌 것과의 접촉이 더 적어진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되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보다는 혐오가 자신을 견고히 하는데 더 효율적이고 쉽게 여겨진다.
대화에 있어서 나는 언어를 세밀하게 쓰기보다 상대방이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에 집중하는 편이다. 서로가 가진 단어의 정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 너머에 목소리의 톤이나 몸짓, 분위기도 함께 듣는다. 하지만 챗봇은 언어만 사용한다. 나의 의도나 기저에 깔린 감정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행한다.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뒤쳐지지 않으려면 글쓰기를 배워야하나? 교육분야에서는 벌써부터 글쓰기를 잘해야 살아남는다거나 질문을 잘해야한다는 선전을 한다. 교육계의 공포마케팅이 마음에 안든다. 그보다는 기술의 방향성을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프롬프트기반 인공지능이 가지는 한계는 언어의 한계에 있을 수 있다. 인공지능은 채팅창 너머의, 언어 너머의 사람을 궁금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