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이는 커서를 마주하고
노트북으로 글을 쓸 때면, 아니, 공책에 펜을 쥐고 무언가를 쓸 때면,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나의 손인지, 펜촉인지, 머리 속의 생각인지, 뭐가 먼저인지 알 수가 없어질 때가 있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 놓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빈 공간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마주하고 손가락으로 활자를 누른다. 어떤 자음과 모음을 치겠다는 생각보다도 떠 빨리, 아니 생각 이전에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다. 머리 속과 손가락이 동기화 된 듯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생각을 쓸 수 있다니. 화면에 쓰여지는 글자를 보면서 생각이 함께 흘러가는 것도 같다.
초등학교에서 컴퓨터과목 방과후 수업을 한 적이 있다. 한글도 잘 모르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처음 타자 연습을 시작하면 피아노를 배우듯이 ㅁㄴㅇㄹ에 왼손가락을 새끼 손가락부터 차례로 놓고, ㅓㅏㅣ;에 오른손가락을 검지 손가락부터 차례로 놓는 것 부터 배운다. 그 다음은 각 자음과 모음을 생각과 동시에 칠 수 있을 때 까지 자리를 바꿔가며 무한 반복 연습이다. 처음엔 버벅이며 헛손질을 한다. 어렵고 지루하니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타자 연습을 하고난 친구들에겐 무조건 자유시간을 보장해주었더니 하는 시늉만 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연습을 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꾸준히 연습을 하면 점점 타자 실력이 늘어가면서 성취감과 재미가 붙어 더 빨리 치고 싶은 열의가 생겨난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타자를 치고 있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그러겠지.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엄마 아빠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무수히 넘어지고 뒤뚱거리면서도 계속 걸음을 내딛어보았던 무수히 많은 시도와 시간들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지금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많은 행동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냥 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숟가락 젓가락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수 있는 것.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악보를 볼 줄 아는 것. 클로바와 괭이밥을 구별할 수 있는 것. 지구가 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키보드를 누르면서 생각을 한다. 텍스트가 연주된다. 뭐가 나올지 나도 몰라. 막지 않고 계속 쳐보면 알 수 있어. 구름. 구름에서 하늘색 코뿔소가 노란 나비랑 춤을 추고 있어. 무슨 소리야? 일단 들어봐. 노란 나비의 날개짓. 코뿔소의 재채기. 흩어지는 구름. 어디에. 어디로. 어디. 여기. 손가락 사이에.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그 어디에 있는 음악이 깜박이는 커서를 뒤로 보내고. 빽스페이스. 다시. 깜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