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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ㅇㅇㅇㅇ를 가지고 있다 2

내가 성인 ADHD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특성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가, 그 설명이 병증으로 귀결된다는 것에 좌절을 느꼈다. 심지어 이건 유전적인 뇌의 기능상 도파민 분비가 잘 되지 않는 것이어서 완치도 없다고 했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듯이 전두엽의 기능을 올려주는 약을 계속 먹어야한다.

처음엔 병원에서 약을 받아서 먹었다. 다른 사람들의 후기로는 머리 속의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는데 나는 그정도의 효과는 없었다. 커피를 마시면 각성되는 정도.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는게 힘들고 점심을 먹고나면 식곤증이 몰려오는데 약을 먹으면 졸리지 않았다. 그당시 나는 약을 먹어서라도 남들처럼 무언가 한가지에 집중해서 결과물을 내보고 싶었다. 주변에 멋진 친구들이 생기면서 그런 욕심이 생겼다. 짝꿍인 문수는 필름사진을 사랑하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담담하고 꾸준히 사진 작업을 한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간다. 돌아와서는 현상하고 스캔하고 컴퓨터로 사진작업을 한다. 그걸로 전시를 하거나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 생각도 없어보인다. 그저 그게 좋아서 한다. (문수말로는 사진이 없으면 못사는건 아니지만 사진을 하면 살것 같다고 한다) 문수 뿐 아니라, 요가와 명상을 꾸준하게 수련해오고 있는 친구, 컨택즉흥춤을 추는 친구, 음악을 하는 친구, 그림을 그리는 친구... 다들 자신만의 매체와 도구를 가지고 매진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글도 쓰고 요가도 하고 창작도 하고 말이야.
코로나 시기여서 시간도 많고 나만 마음먹고 하면 되는데 말이야.
도대체 왜 안되냔 말이야.

그러다가 성인 ADHD라는 걸 발견했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대학동기이자 나의 베스트프렌드인 친구 E는 뉴욕에 살고 있는데, 1년에 몇번 긴 통화를 한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책 한권을 보내줬다. 정지음 작가의 '젊은 ADHD의 슬픔'이라는 책이다. 우울증인줄 알고 병원에 방문했다가 성인 ADHD를 진단받은 작가의 솔직하고 유쾌한 경험담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다. 성인 ADHD가 궁금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나에게 상담을 청해온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짝꿍 문수는 도서관에서 영화감독 김곡의 '과잉존재' 라는 책을 빌려와서 나에게 읽어주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한 친구의 추천으로 한병철 철학자의 '리추얼의 종말'을 읽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개인적인 병증으로만 생각하던 성인 ADHD가 시대와 사회 구조적인 영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이 책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기억과 인터넷의 책설명에 의존하여 설명을 해보자면...

mllonollm "나는 ADHD에 항복하고, 질환의 파편으로 존재하는 모든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ADHD와 나는 원심분리기에 돌려도 분리되지 않으니 차라리 공존을 택한 것이다." -젊은 ADHD의 슬픔 중에서

“오늘날 ADHD, 우울증, 일중독 같은 상이한 증상들이 동시에 대중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달라 보여도 그들 모두는 하나의 동근원적 질환, 즉 감각 및 행동의 경계가 와해되는 데서 오는 ‘과잉조절장애’다. 그 본질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긋지 못하는 결단력의 부재에 있다.” - 과잉존재 중에서

"현재 만연한 개방과 탈경계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맺음 능력을 상실해간다. 그리하여 삶은 한낱 가산적인 것이 된다. 죽음은 삶이 특별하게 끝맺어지는 것을 전제한다. 삶에서 모든 맺음의 가능성을 박탈하면, 삶은 때아닌 때에 끝난다. 오늘날엔 심지어 지각도 맺음 능력이 없다. 지각은 서둘러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옮겨 간다. 오직 관조하며 거주하기만이 맺음의 능력을 지녔다. 눈 감기는 관조적 맺음의 상징이다... " - 리추얼의 종말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전 시대가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투쟁하는 시대였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경계를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경계가 없는 시대라는 설명이었다.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희미해져가고, 퇴근을 했는데 퇴근이 아닌 것 같은.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한 시대, 관심이 곧 돈이 되는 시대에 사방에서 나의 주의를 뺏기 위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고, adhd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더욱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adhd적인 성향은 지금의 성장위주의 자본주의 시스템안에서 목적지향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에서 문제가 된다. 허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받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장점일 때가 많다. 나의 흥미와 호기심이 발동하는 영역에서는 누가 말려도 열정을 가지고 몰입을 한다. 마음이 가지 않는 일을 할 때엔 실수가 나오고 민폐캐릭터가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그런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려면 약을 먹어가면서 '새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프리렌서여서(20대에 회사원 1년 해보고 이건 앞으로 내 인생에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약은 더이상 먹지 않고 있다. 대신 아침마다 커피를 마신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나의 상황에서는 이 정도로도 사는데 큰 불편이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다. 그래도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습관을 들이고 싶을 것이 생겼을 때, 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지난 나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이런 성향 덕분에 나에게 맞는 삶의 꼴을 찾아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좌충우돌 흥미로운 나의 인생. 고맙다 adhd!

오늘은 여기까지.. 수정될 수 있고 지워질 수 있음. 물론 안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