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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지에 대한 감사 1

서식지에 대한 감사, 퍼포먼스 워크숍을 듣고 남기는 기록.

신산리에 있는 신술목 학교에서 은영과 영선이 연 서식지에 대한 감사 프로그램에 6주 동안 참여했다. 첫날, 우리는 신산리 마을 일대에서 길잃기 산책을 했다. 핸드폰 없이 나가서 15분동안 길을 잃는 산책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즉흥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길잃기 산책에 자신이 있었다. 길을 잃으려고 하지 않아도, 심지어 잘 찾아가려 해도 곧잘 길을 잃고는 하기에. 그런데 신술목 학교 밖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기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왔다. 바다가 가까워 나도 모르게 학교가 있는 공간적 방위가 바로 인식되었다. 주변에 있는 높은 건물들과 눈에 띄는 집의 색깔들.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고야 마는, 길을 잃을 수 없게 만드는 표식들이 자꾸 보였다. 어떡하지. 고사리를 따다가 길을 잃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바닥만 보자. 아스팔트 바닥에 있는 금을 따라서 걷자. 그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도 토끼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이상한 나라로 가잖아. 아스팔트의 금을 따라 걷다보니 바닷가로 나왔다. 이런, 결국 가장 크고 쉬운 위치적 힌트에 와버렸네. 신산리 바닷가는 해무가 잘 낀다. 이건 6주 동안 신산리에 오고 가면서 알게된 것이지만, 그날도 수평선은 해무로 인해 경계가 모호했다. 망망대해. 그 단어가 떠올랐다. 저 바다로 나가면, 망망대해에서는, 길잃기가 쉽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길을 잃은건가?

이정도 걸었으면 10분쯤 지났을까. 나에게 15분의 감각은 걷기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10여년 전에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1km는 15분쯤 걸린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되었다. 뒤를 돌아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이제는 길을 찾는 산책이다. 바닥만 보고 걸었다고 해도 정말로 계속 바닥만 볼 수는 없었으므로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을 찾는 모드로 길을 걸으니 길을 잃을때와는 달리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담벼락에 핀 무궁화처럼 생긴 이름 모를 꽃. 세 명이서 팔을 벌려도 아슬아슬하게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나게 크고 멋진 팽나무. 꽃분홍 색으로 칠해진 예쁜 집. 아무리 아까 바닥에만 집중했다고 해도 아까 지나온 그 길이 맞나? 어쩌면 집에 돌아가는 감각을 새롭게 깨우기 위해서 길을 잃는 것이 필요한게 아닐까?

15분이 지나고 다행히 모두가 무사히 길잃기 산책을 마치고 모였다. (핸드폰도 없이 정말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살짝 걱정을 했었다) 워크숍의 가이드를 하는 영선은 포스트잇에 우리의 산책에서 발견했거나 마음에 남은 것을 써보자고 했다. “아스탈트의 금 밟기”, “망망대해”, “크고 멋진 팽나무”, “담에 핀 무궁화”, “이제 아는 길”, “길을 잃은건가?”, “길냥이를 쫒아서” 를 적었다. 우리는 매주 그렇게 포스트잇에 서식지의 조각들을 적어 벽에 붙여 모아갔다.

몇 주가 지나고, 우리가 그동안 모은 포스트잇에서 각자 제일 끌리는 포스트잇을 하나 골랐다. “검은개, 너는 왜 사나워?” 나는 그 검은개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는데, 그 포스트잇 앞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너는 왜 사나울까. 왜 사나운걸까. 왜 사나워졌을까. 사나우면 안되는 걸까. 너의 서식지에서는 사나워도 되지 않을까.

몇년 전 제주에서 배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너 녹동항에서 진안까지 차박여행을 했던 적이 있다. 차를 몰고 구례쪽을 지나다가 길가에 “문수사”라는 팻말을 보고는 흥미가 생겼다. 나의 짝꿍의 이름이 ‘문수’이기 때문이었다. 즉흥적으로 핸들을 꺽어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을 굽이굽이 꽤 오랜시간을 올라 문수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반달곰이 있었다. 시주를 받아서 키우다가 사나워서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 우리에 가둬두었다는 안내문과 함께. 그때 나는, 굽이굽이 굳이굳이 깊이 들어온 길이, 사료주기 체험을 위한 바가지가, 상쾌한 숲 내음이, 해맑게 신발을 물고 튀어가는 누렁이가, 그 안에 서 있는 나의 존재가, 사납게 느껴졌다.

우리는 각자의 키워드들을 품고 즉석에서 퍼포먼스를 만들어 수행해보는 연습을 했다. 아래는 “검은개, 너는 왜 사나워?” 에서 나온 예행 퍼포먼스다.

거실을 가로질러 티비 아래의 서랍을 연다. 열린 서랍의 깊숙한 뒤쪽에 손을 뻗어 집어넣는다. 휘적거린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왜 사나워?”
벽에 걸려있는 달력으로 다가간다. 달력을 손으로 만져본다. 얇은 옆면을 손가락의 바닥면으로 쓸어본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왜 날카로워?”
쇼파에 다가간다. 엎드려서 바닥과 쇼파 사이의 틈에 얼굴을 들이밀어본다. 손도 넣어본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왜 더러워?”

이 퍼포먼스를 머리 속으로 계획했을 때에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깊숙하고 은밀한 속을 노크없이 헤치며 “너는 왜 사나워?” 라는 질문을 반복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퍼포먼스를 하다보니 다른 문장을 말하게 되었다. 사물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손을 베인 것은, 먼지를 묻힌 것은, 사납게 휘적거린 것은, 움직인 것은 나였다.

-To be continue... 아마도...